배경
사이드잡으로 외주를 같이하는 팀이 있다. 나는 개발자 역할이고, 다른 한 팀원이 기획자 역할인데, 해당 팀원의 기획서를 보면 너무 어지럽고 시작부터 읽기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상당히 오래 같이 일을 해와서 이젠 익숙해질때도 됐는데 뭐가 문제여서 아직도 보기 어려운 기획서일까 생각해봤고, 그 내용을 여기 정리해둔다.
초보 기획자의 오해
우선 (초보) 기획자와 개발자의 뇌 구조가 다른 걸 이해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기획자는 메이커가 아니다, 요청자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로 접근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로도 접근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들은 어떻게 "보이는" 것을 만들지에 집중한다.
어떻게 "보이는" 것은 다음 내용들을 포함한다.
- 화면 디자인 (UI)
- 이 버튼을 누르면 어디로 이동하는지 (ex. 프로필 사진을 누르면 마이페이지로 이동)
- 이 버튼을 누르면 무슨 창이 뜨는지 (ex. 회원가입 버튼을 누르면 환영합니다 모달이 뜸)
- 여기서 이 행동을 하면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ex. 글쓰기 페이지에서 글을 다 쓰고 작성완료 버튼을 누르면 홈 화면의 글 목록에 보인다.)
초보 기획자들은 지금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페이지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 것들을 다른 모든 페이지에 적용하면 좋은 제품을 기획했다 착각한다.
어떻게 보이는지는 제품이 아니다.
누군가는 위 방식이 맞다 할 수도 있다. "이 화면에서 이 버튼을 눌렀을 때 이 기능을 하는게 우리 제품의 핵심 아니야?" 라고 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제품을 처음 상상할 때로 돌아가보면 너무나 쉽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 유튜브 광고 관리 솔루션을 만들겠다 생각했다 해보자. 우리는 맨 처음에 무슨 생각을 하며 제품을 상상할까? 적어도 나는 아래처럼 생각할 것 같다.
자동으로 각 소재의 성과측정을 하면서 입찰가 변경이나 소재 on/off 노출 환경 조정등을 해주면서 최적의 광고 관리를 해주면 되게 좋을 것 같은데! 유저가 자기 유튜브 광고 계정을 먼저 연동하게 하고, 연동이 되면 모든 소재 정보를 긁어와서 저장해뒀다가. 매일 성과보고서를 긁어와서 최적의 노출 정보를 계산한 다음에 자동으로 조정해주면 될 것 같아. 근데 우리가 어떻게 조정해왔는지 보여줘야 하니까 대시보드 같은 곳에 각 날짜별 성과와 계산된 최적의 노출 정보를 보여주고, 조정 값의 before > after를 보여주면 될 것 같네. 근데, 유저가 원하는 성과 지표가 있을거니까 유저가 광고 소재별로 원하는 성과 지표를 입력하게 하고, 최적 값 계산에 이 성과 지표를 사용하면 되겠다. ...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엔 위처럼 생각할거라 믿는다. 그리고, 이게 곧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제품이다. 제품이란 화면의 집합이 아닌, 플로우의 집합이다 "유저가 소재 정보를 입력하고 -> 목표 성과 지표를 입력하고 -> 자동으로 최적값을 조정하고 -> 기록을 보여준다" 라는 플로우 들의 집합이 곧 제품인 것이다. 그리고, 이게 곧 기획이다.
플로우로부터 화면과 정책이 따라온다
이처럼 핵심 플로우가 나오면 이제 살을 붙이게 된다. "유저가 소재 정보를 입력하고 -> 목표 성과 지표를 입력하고 -> 자동으로 최적값을 조정하고 -> 기록을 보여준다"
유저가 소재 정보를 입력하려면 소재 목록 페이지가 있고, + 버튼 같은게 있으면 되겠다. 그럼 "소재 목록 페이지"를 만들고... 목표 성과 지표는 "소재 상세 페이지"에서 정하는게 낫겠지? "소재 상세 페이지" 추가.. 자동으로 최적값 조정은 백엔드에서 주기적으로 하면 되고 기록을 보여주는건 "소재 상세 페이지"에 기록을 그래프 형태로 보여주는 섹션이 있으면 될 것 같네. "소재 상세 페이지"에 "기록 그래프" 추가..
각 플로우의 항목에 필요한 뷰를 생각해 끼워넣었다. 이처럼 뷰는 유저 플로우에 접근하기 위한 인터페이스로써 추가하게 된다.
여기서 첫 (초보) 기획자의 기획안이 나온다.
- "소재 목록 페이지" 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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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튼을 누르면 "소재 정보 등록 모달"이 뜬다.
- 이 모달에서 소재 ID / 이름 / 시각 등을 입력하고
- 하단의 "등록" 버튼을 누르면 소재가 등록된다.
- 버튼을 누르면 "소재 정보 등록 모달"이 뜬다.
- 등록한 모든 소재가 목록으로 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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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 상세 페이지" 스펙
- ...
이러한 화면 기획안도 물론 중요하다. 오히려, 각 화면을 개발할 땐 위 화면 기획안만 보고 개발할 때도 있다. 하지만 화면 기획안은 결국 플로우 기획의 산물이고, 보조 기획안일 뿐이다. 제품 기획에서 가장 먼저 수행되어야 할 건 결국 플로우 기획이다.
이제 조금 더 살을 붙여보자.
근데, 목표 성과 지표엔 무엇들이 있을까? 일단 ROAS, View count 정도 설정하면 되겠네. ROAS를 너무 크게 잡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0 ~ 1000% 사이로 입력하게 하고.. View count는 범위를 설정하기 애매하네 int32 범위 내로만 정하게 하자.
자연스럽게 살을 붙이고 나니 플로우 중 "목표 성과 지표 설정"에 정책이 붙었다.
정책
- 목표 성과 지표는 ROAS, View count 중 하나를 설정할 수 있다.
- ROAS는 0~1000% 사이로 입력 가능하다.
- View count 는 unsigned int32 범위 내에서 입력 가능하다.
기획서는 유저 플로우부터 시작해야한다.
여기까지 내용을 종합해보면, 제품이란 유저 플로우에서 시작해 화면과 정책이라는 살을 붙여나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자연스러운 생각 (논리)의 흐름이다.
기획서란 논리적으로 제품에 대한 기획을 전달하는 글이다. 기획서를 처음 보는 대상자에게 내가 어떤 제품을 만들것인지, 이 제품의 구성요소는 무엇들이 있는지 논리적으로 한 눈에 이해할 수 있게 작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연스런 생각의 흐름에 맞춰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의 첫 시작은 유저 플로우이다. 이 제품을 사용하는 유저가 어떤 흐름으로 사용할 것인지, 그리고 그 흐름에서 우리 제품이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먼저 설명해야 한다.